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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느낄 때
[최 남미]
하나, 회식
회식 날, 풀어놓은 허리춤이 눈에 띄지 않게끔 식당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건배를 시작으로 몇 순배 술잔이 돌자 금세 가족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야기장단에 빠져 내 술잔이 비었는지도 모르는 눈치 없는 직원들이 슬그머니 미워졌다. 예전에는 마시는 시늉만 했었지만 이제는 얼마든지 마실 수 있는데….
계산을 치르고 나오니 나보다 젊은 상사가 말을 건넨다.
“회식 때문에 늦어서 어쩌죠? 아이들 때문에 2차는 가기 어려우시죠?”
기분 좋게 취한 그들의 인사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꼬여 휘청거렸다. 아, 나도 90년대 초 한 가수가 유행시켰던 토끼춤을 추면서 무대가 좁다고 겅중겅중 뛰던 때가 있었는데…. 빈말이라도 같이 가자고 하면 어디가 덧나나?
둘, 겨울준비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이 옷 속을 파고들다 못해 뼛속까지 시리게 한다. 아직 잎을 매달고 있는 나무가 많은 것으로 보아 분명 가을인데 왜 이리 추운 걸까? 도톰한 겨울옷을 남 먼저 꺼내 입었건만 사정없이 안겨드는 찬바람을 이길 재간이 없어 결국 내복을 사 입었다. 하지만 내복으로도 추위를 달래지 못하여 온돌에 몸을 맡긴다. 짤짤 끓는 방안에 누워 뼈 마디마디 스며있는 추위를 떨쳐내노라면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시원함이 느껴진다.
수도마저 꽁꽁 얼어붙어 얼음을 깨고 길어온 물로 한겨울을 지내던 산마을에서의 생활, 영하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얇은 스타킹 한 장에 무릎 위로 댕강 올라온 치마를 입고 멋을 내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는데…. 아, 옛날이여!
셋, 건망증
날씨가 건조해지기 시작하는 늦가을부터 봄까지 정전기에 시달린다. 주변의 전기는 모두 빨아들이는 능력이 있는지 입맞춤을 하려고 아이 볼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대기만 해도 ‘따끔’ 하는 정전기 때문에 흠칫 놀라게 된다. 그래서 이맘때면 늘 정전기 방지용품을 지니고 다니는데 애지중지하던 그 물건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가을이 되면 다시 쓸 요량으로 어딘가에 보관해 두었는데 도대체 찾을 수가 없다. 어디다 두었을까?
친구들은 나를 보고 ‘별 걸 다 기억하는 여자’라고 부른다. 수업시간에 졸다가 분필세례를 맞은 친구이야기, 주근깨를 없애려고 바른 화장품이 덧나서 빨간 얼굴이 되었던 친구이야기, 수업시간에 남자친구에게 편지를 쓰다가 선생님께 들키자 종이를 삼켜버린 친구이야기, 심지어는 국어 시험문제까지 그녀들의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은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는 나는 정말 기억력이 좋은 사람인데…. 도대체 어디에 두었나? 찾다 찾다가 포기하고 새로 장만한 날, 얄궂게도 핸드백 안에서 그 물건이 나왔다.
넷, 얼굴
몸짱인 친구가 있다. 군살이 없는 그녀는 20대 냄새가 물씬 풍기는 옷을 즐겨 입는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교육갈 때 입으려고 주 고객층이 젊은 여성들인 가게에서 몸매를 강조하는 윗옷과 아랫단 부분을 끈으로 장식한 바지를 장만하였다. 연수원에 가던 날, 터미널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커다란 배낭까지 맨 나를 영락없이 여행 떠나는 노처녀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흐뭇한 얼굴로 생수를 사러 가게에 들어섰다. 그 순간 주인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줌마, 뭐 찾으세요?”
몇 년 전, 길거리에서 한 청년이 뒤따라오며 아줌마를 애타게 불렀다. 왜 그러냐며 뒤돌아보았더니 그는 허리를 숙이며 미안하다고 했다. 길을 물어보려고 했는데 옷차림만 보고 아줌마라고 부르는 무례를 저질렀다며 연거푸 사과를 했었다. 영영 나이 먹을 것 같지 않던 내 얼굴이. 아, 이제는 젊은 감각의 옷으로 치장하여도 어쩔 수 없게 되었구나. 달콤한 착각에서 깨어나는 순간 지금껏 마주친 사람들이 상기된 내 얼굴을 보면서 집 나온 아줌마라고 생각했으면 어쩌나 싶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섯, 배움
남편은 기계치다. 나 또한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전제품을 사면 사용설명서를 읽어서 익히곤 했다. 얼마 전 여러 가지 기능이 있는 전화기를 장만했다. 휴대폰만큼이나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는 전화기를 익히기 위해 설명서를 펼쳐놓고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도대체 머리에 입력이 되지 않는다. 끙끙대며 뒤적이던 설명서를 결국 내동댕이쳐 버렸다. 녹슬어가는 머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다른 기능은 애당초 없었던 것처럼 걸고 받기만 하는 원초적 기능만 사용하기로 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전화기를 장난감처럼 만지작거리더니 사용설명서 없이 여러 가지 기능을 터득했다. 끝내 기능을 익히지 못한 내가 건네준 메모지를 보고 아이는 문자를 보내준다. 이제 내 머리는 열 살 딸아이보다도 못한가 보다. 새 기계를 익히는 것을 겁내다가 전화를 걸 줄 몰랐던 할머니처럼 나 또한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여 낙오자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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