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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교향곡
1. 늦가을의 소묘
가마솥에선 메주콩이 아까부터 뜨거운 김을 내며 끓고 있다.
나는 또 한 다발의 콩깍지를 아궁이 속에 디밀어 넣는다.
“타닥, 타닥, 타다닥….”
활활 타며 불길이 일고 콩깍지는 소리를 지르며 타들어 가고 있다.
‘메주콩과 콩깍지…’ 참으로 묘한 인연인 것 같다.
콩의 자라는 시점은 여름이 시작 되는 하지에서부터다.
초여름에 싹을 틔워 뜨거운 땡볕을 받으며 모질게 자라 꽃을 피우고
콩을 생산하는 식물이다.
어찌 보면 열매는 자식이고 가지는 어미 같으련만 그 자식 같은 콩을 삶기 위해
지금 콩깍지는 온몸을 사르며 아궁이 속에서 타고 있다.
자연의 이치도 인간사와 비슷한 것일까.
콩깍지의 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갑자기 어느 어머니의
숭고한 모성애가 생각나기에 그런 생각도 해 보았다.
그 어머니는 아들의 등록금을 마련하고자 사방으로 다녔으나 여의치가않자
종합병원 안과를 찾아갔다.
“선생님, 제 한쪽 눈을 좀 팔아 주십시오. 저는 한쪽 눈으로도 살아갈 수 있지만
제가 아들의 학비를 마련하지 못하면 그 애는
영영 두 눈을 뜨지 못하는 장님이 됩니다.”라고 하셨단다.
모체란 원래 희생의 제물로 태어난 것일까.
끝없는 사랑으로 자기의 희생조차 마다않는 숭고함이 늘 마음에 남는
그 어머니의 이야기다.
불꽃을 보며 잠잠히 생각 속에 있는 동안에도 가마솥의 콩은 무심히 끓고 있고
콩깍지는 아궁이 속에서 아낌없이 몸을 태우고 있다.
인간사의 부모 자식처럼….
우주의 모든 이치가 그런 것 같다.
비록 스스로 선택한 일이야 아니지만 콩깍지가 타며 콩을 삶는 것도
모든 섭리는 사랑으로 이루어지게 빚어낸 조물주의 뜻인 것 같다.
“후두둑, 후두두둑…”
이번에는 들깨의 빈 쭉정이를 밀어 넣었다.
불은 순식간에 활활 오르고 고소한 냄새가 가을바람에 섞이며
온 동네를 고소하게 만든다.
쉴 새 없이 끓으며 넘는 메주콩의 구수한 냄새도 함께 어우러져
깊은 가을의 맛을 더해주고 있다.
나는 이 가을이 좋다.
빈 가지를 태우며 코에 스미는 가을 냄새도 좋고
텃밭에서 여름찌꺼기를 태우며 고즈넉한 가을을 바라보는
이시간이 참으로 좋다.
된서리 맞은 호박넝쿨이 마른 잎을 달고 나무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삭막함 조차도 좋고
희끗희끗한 눈이 산자락에 앉아있는 대관령의 풍광을 보는 것도 좋다.
휴식에 들어간 빈 밭에 서있는 옥수수 대사이로 들락거리는 바람을 맞는 것도 좋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며 즐길 수 있는 지금의 나는 더욱 더 좋다.
“탁, 탁, 탁”
훨훨 타고 있는 불 위에 생솔가지를 얹으니 둔탁한 소리를 낸다.
가마솥 안의 콩도 거의 다 무르고 이젠 뜸을 들여야 할 것 같다.
불길은 생나무에 눌려 주저앉아 버리고 굴뚝을 타고 번지는 매캐한 연기가
은은한 생솔냄새를 안고 하얗게 번진다.
안개처럼 깔리는 자욱한 연기는 저 건너 사시는 할머니집의 늙은 매화나무를
보여주다가 가렸다하기를 반복하며 늦가을 저녁 속으로 흐트러진다./2010. 11.
<출처 : 수필문학 2012. 신년호>
2. 친구에게
그동안 나는 좋은 것을 바라고 살지는 않았다네.
그런데도 내겐 언제나 무의미한 생의 연속뿐이었었지
난 그걸 탓하지는 않았지만
무덤덤한 세월에 늘 염증을 느끼며 살아왔었지.
그런데 요즘 비로소 나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났다네.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는 이토록 아름다운 계절에
새소리는 음악처럼 흐르고
창문만 비켜 놓으면 솔밭과 바다를 볼 수 있는 집에서
문 비집고 들어오는 신선한바다 냄새 맡으며 편지글을 쓰는 행복…
그리고
평범한 식탁 위의 푸성귀와
낚시 해온 물고기 두 마리로 만든 매운탕에서
시름없는 생의 한 토막을 발견 할 때.
어찌 이리도 아름다운 날이 나에게도 주어지는지
모든 것이 감격스럽고 사랑스럽기만 하다네.
하나님은 내가 바라지 않았던 좋은 것 까지도
내 삶에 덤으로 얹어 주셨다네.
그리고
삶의 가치기준을 말없이 내게 가르쳐 주셨다네. /2008. 4.
3. 장선생님께
이른 저녁밥을 차려 주고 더위를 식힐 겸 고추를 걷으려고 문 밖으로 나오니
비릿한 바다향이 짠 내와함께 바람 따라 내게로 날아옵니다.
고추를 걷어 들여 놓고 빈 대나무 자리에 벌렁 누워서 하늘을 보니
구름은 석양에 물들어 가고 새들이 무리 지어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글쎄…. 저 새는 무슨 새일까요….
이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오라기일까요?
날개를 펴서 천천히 예닐곱 마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날아가는 평화로운 모습은
시골하늘에 그려 놓은 아름다운그림이기도 합니다.
고추잠자리는 어디서 밤을 지낼 건지
아직도 허공에 맴을 돌며 한가한 저녁 유희를 하고
식구들의 소박한 저녁 밥상에서는 숟가락으로 그릇 부딪는 소리가
타악기의 맑은 음처럼 달그락거리며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흘러 나옵니다.
잔등이 밑에서 대자리가 주는 시원한 감각과 함께 몸속으로 스미는 찬 기운은
가을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듯 합니다.
아… 이 청량함…. 그리고 온전한 평화, 나의 집….
장 선생님.
오래 전부터 제가 원하던 삶의 그림이 바로 이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행복한 저녁을 신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곳 강릉의 한 쪽에서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 속의 전원 보다
더 전원풍의 삶을 살아가는 저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어 글을 쓰려고 합니다.
오랜 시간을 귓전에서 쟁쟁거리던 기계소음을 뒤로하고 도시적인 모든 생각과
생활을 일순간에 접은 채 이곳으로 온지 두 번째의 여름이 지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들의 서툰 농사가 동네 사람들에게는 웃음을 선사하는 때도 있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지난봄에는 감자를 수확해서 이웃과 갈라 먹기도 했고
지금은 붉은 고추를 마당에다 널어 말리기도 합니다.
올해는 긴 장마로 고추 수확이 좀 더딘 편인데다
탄저병으로 썩은 고추가 태반이어서 우리를 애 태우고 있지만
그래도 잘 자라준 길고 매끈한 고운 고추를 보면
마음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답니다.
어제는 호박과 단 호박도 수확해서 처마 밑에 두고 보니 지난 해 다녀가시며
늙은 호박 두개를 좋아라고 들고 가시던 선생님 생각이 났습니다.
"그곳에서 가지고 온 호박 두개가 창가 장식장 위에 놓여있습니다.
보는 이마다 좋아해요.
따면 또 열고 따면 또 열고 그래서 옆집 누구든 따다가 된장 끓여 먹던
그 넉넉함과 풍요로움이 그리워서 해마다 나는 늙은 호박을
거실에 여러 개 놓아둡니다."
하셨던 선생님의 글을 끄집어내어 읽으며 가끔씩 선생님 댁의 거실을 생각 해 보기도하죠.
올해도 대구 가는 길에 참한 호박 두어 개를 선생님 댁에 넣어 드리려 하니
거실에 놓아두고 보시면서 절 응원 해 주시기 바랍니다.
올 여름 저희 집 마당 울타리에는 해바라기를 여러 포기 심었습니다.
해수욕장 바로 앞인데 집이 너무 드러나 보이기에
해바라기로 집 안을 좀 감추고 싶은 생각으로 심었었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7월 말부터 피기 시작한 해바라기가 8월 중순 까지 피는데
한 줄기에서 보통 대여섯 개의 꽃이 주렁주렁하고 그 노란 빛깔은 또 어찌나
순수하던지 해수욕장에 온 사람들의 시선을 한 눈에 잡았답니다.
더불어 백일홍과 봉선화의 어우러짐으로 저희 집은
외지인들의 사진배경으로 쓰이느라 집이 더 노출되었답니다.
저의 의도는 가꾸지 않은 듯하게 손질한 화단에 일년초를 심어
유년의 기억이나 해 보고 싶었는데 좀 빗나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좋은 기억이 남는 여름이었습니다.
부드러운 흙이 좋아서 맨발로 호미 한 자루 들고 밭에 나가 김을 메는 날은
온 대지가 나의 것 같은 만족을 느끼기도 하고
긴긴 6월 한나절 잡초를 뽑느라 씨름을 했는데도
돌아서면 다시 올라오는 풀을 보며
자연 앞에 무기력한 나의 한계에 고개 숙이기도 합니다.
하찮게만 생각했던 풀이며 곤충의 한살이도 부대끼며 힘들게 살기는
사람이나 마찬가지고 끝까지 살아남아서 좋은 생을 마감하기 까지는
수 없는 시달림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키가 큰 해바라기가 비바람에 시달리고 꺾여도
인고의 세월을 지나면서 예쁜 꽃으로 사랑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시골에서 사는 삶이 즐거워졌습니다.
“어려움은 먼 훗날 나를 성숙하게 만들어준 감사로 신께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라며 제게 말씀 하셨던 선생님을 생각하며
지나간 날들의 힘든 삶을 통해서 얻어진 마음의 평화와
지금의 모든 것을 감사의 제목으로 삼고 살아가겠습니다.
장 선생님 이것도 아시나요?
잡초에게도 자연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뿌린 씨앗은 움이 틀 때 뭉쳐서 올라와도
바람에 의해 뿌려져 저절로 싹이 트는 잡초는 하나씩 각각 흩어져 나는 걸
저는 보았습니다.
창조주께서는 하찮은 잡초에게도 이렇게 생명이 편안히 살아갈 수 있도록
놀라운 사랑을 베푸셨다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지금의 이 곳 생활은 저를 위해 미리 예비 해 두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아닌가 싶습니다.
잘 살겠습니다.
비록 한적한 시골집에서의 생활이지만
곤드레 고비나물 삶아서 말리고 빨간 고추며 가지 호박오가리에 시래기 까지
마당이 비는 날 없이 널려있는 부지런한 시골 사람들의 생활을 배우며
잘 살아가겠습니다.
재임 시절에는 언제나 학생들의 편에서 힘이 되어 주시더니
퇴직 후에도 늘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도움을 받은 모두의 마음은 장 선생님의 건강을 걱정할 것입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하나님의 특별한 가호가 장 선생님의 가정에 늘 머물길
기도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200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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