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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그림 - 사택 안 이웃들
어릴 때 우리는 아버지가 다니시는 회사의 사택에서 살았다.
같은 회사의 비슷한 형편과 연령의 이웃들과 살았던 탓인지
나이가 들어도 가끔씩 내 유년의 기억 속에서 만나는
보고 싶은 이웃들이다. 어디서 지내시는지……
1. 혜란 엄마
혜란은 엄마의 극성에 눌려서 늘 힘들었다.
부모님과 밑으로 여동생이 셋이고 막내인 남동생까지 한방에 같이 살면서도
엄마로부터 늘 1등을 강요당했다.
혜란의 시험기간 중에 혜란 엄마는 식구들을 일찍 재우고
딸의 시험공부 하는 것을 지켜본다.
뜨개질도 하고 떨어진 양말도 기우면서 혜란이가 졸면 등을 두드려 깨워서
공부를 시킨다.
더운 날, 모든 문을 다 열어놓고 모기장 속에서 부채질하며 밤늦도록 공부
를 시키는 모습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런 엄마 때문에 학교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으나 혜란의 어께에는
“네가 공부를 잘해서 교육대학엘 가야 네 동생 공부를 시키는 거야 알간?”
하는 엄마의 말이 늘 무겁게 올려져있었다.
오남매 맏이에 대한 기대만큼 지원 역시 전폭적이었다.
늘 꾸지람을 하면서도 품으며 곱게 키우는 훌륭한 어머니였다.
착한 혜란은 그 후 교육대학을 나오고 엄마의 소원대로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하며
부모님에게 힘이 되어 주었고 뿐만 아니라 셋째 딸은 늘 수석을 하더니
대학교수가 되어 고생한 어머니에게 보람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렇게 혜란 엄마는 모든 것에 적극적이었고 보통사람은 아니었다.
고향이 이북인 혜란 엄마는 키도 크고 이북 말을 쓰는 것만으로도
몇 집 안 되는 우리 동네에서는 대장엄마로 통했다.
그래도 무슨 일을 하던지 분명했고 정직했으며 사리 판단을 잘 하는 사람이라
동네의 일이 생기면 모두 혜란 엄마를 찾아 의논하곤 했다.
혜란엄마 보다 몇 살 위인 우리 어머니와는 형님 아우님 하는 사이였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도 남다른 정을 그 집 식구와 나누며 살았다.
어느 날은 마루에서 어머니와 혜란 엄마가 함께 붙들고 울고 계신 것을 보았다.
우리언니의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이 났다고 했다.
고생하는 큰 딸이 안타까워 가슴앓이 하는 우리어머니의 속을
눈물로 위로해주는 따뜻한 마음씨에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내 어머니도 타향에서 지내다보니 속사정을 이야기 할 형제가 곁에 없는 터라
그렇게 동기간처럼 서로를 위로해가며 사셨던 것이다.
억세고 강한 외모에서 느끼지 못했던 따스함에
친척 같은 가까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내겐 잊히지 않는 사건 때문에 지금껏 부끄러워지는 일이 있다.
혜란과 나는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여서 내가 입던 교복을
후배인 혜란에게 물려준 일이 있었다.
그 교복주머니에다 깜빡 잊고 마지막 학년 성적표를 넣은 채로 보냈다가
뒤 늦게 생각나서 황급히 찾으러 갔더니 혜란 엄마의 그
‘오~, 네 성적이 그랬구나.’ 라는 듯이 보는 눈빛에
무척 창피스럽고 무안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동네에서는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지내던 내가
반에서 10등 안에도 못 들어가는 성적표를 부모님에게도 못 내놓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중이었는데 엉뚱한데서, 그 것도
동네에서 제일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혜란엄마는 누가 잘못하기라도 하면 가차 없이 나무라고 혀를 끌끌 차면서
“에미나이 못 쓰갔구만.” 하기 때문에
우리들도 기가 죽어 혜란엄마 앞에서는 조용히 다니곤 했었는데
이제는 고개까지 숙이며 지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무수한 만남과 이별을 거치며 살아간다.
도시생활의 복잡한 관계에서 피할 수 없는 나 역시 수 없는 이사를 하며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겪어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러 사람과 사귀며 가까운 이웃도 많았었지만
이웃집이라면 늘 잊히지 않고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혜란 엄마였다.
세월이 지나고 내 아이가 다시 어른이 되기까지의 시간이 흐르니
혜란 엄마처럼 자식과 가정에 또 이웃에게 할 수 있는 사람이
흔치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이웃하며 살던 그 곳은
이미 아파트며 도로가 되어 흔적도 남아있지 않고
이집 저집에서 아침저녁 밥상에 둘러앉아 웃던 행복한 웃음소리는
세월에 흩어져 이젠 들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두렵게만 들리던 혜란엄마가 꾸짖는 그 이북 사투리만은
세월을 거치면서 행복한 메아리가 되어 지금껏 내 귓전에 남아있다.
“에미나이 못 쓰갔구만.” 이렇게….
2. 국희엄마
부지런하고 깔끔한 국희엄마는
고무신에 항상 물이 담겨서 찔꺽찔꺽하는 소리를 내면서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눈이 크고 까만 예쁜 얼굴인데도
그 시절엔 먹고 사는 일이 시급한 때라 외모는 관심 밖이었는지
꾸미지 않은 얼굴에 긴 머리는 질끈 묶어 올리고
거치적거리는 긴치마를 대충 올려 끈으로 묶어 고정시키고 다녔다.
국희엄마는 늘 찌그러진 양은그릇에 물을 넘치도록 담아
하루 종일 이리저리 들고 다니면서 걸레질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발에 뼈가 불거져 코고무신에 제대로 담기지도 않는데
종일 신발에 물이 있으니 미끄러워 신으나마나한 고무신이 귀찮았던지
일본식신발 게다를 신고 다니기도 했다.
국희엄마는 식구들 밥을 굶기면서까지 저축을 했다.
일찍이 남의집살이의 경험을 한 사람이라
돈의 소중함을 잘 알았다.
학교 도시락밥은 꽁보리밥으로 보내고
집에 남은 식구는 밥이 아예 없었다.
국희 네는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늘 허름한 바지저고리소매를 걷어 입고 허기진 모습으로 다니면서
지게 품을 파셨는지 어깨에다 항상 지게를 걸머지고 다니셨다.
가끔 우리어머니가 점심에 국희 할아버지를 불러서
계란으로 수란을 만들어 밥상에 놓고 대접해드리면
아주 맛있게 잡수시곤 했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식구들은 집에 들어가기 전에
옷에 앉은 먼지를 말끔히 털어야한다.
옷 털고 들어가라는 국희엄마 고함 소리가 뒷집까지 들리곤 했다.
그래도 옷은 자주 빨아주지 않는다.
사택에서 쓰는 수돗물 값은 회사에서 지불하니까
하루 종일 철철 넘치도록 물을 들고 다니며
마루, 부엌 그리고 장독까지 물마를 틈이 없이
닦고 또 닦아 집이 윤기가나도록 청소하고 마음대로 썼지만.
돈 주고 사야하는 비누가 아까웠기 때문이다.
3. 희야엄마
우리 앞집의 희야 네는 딸만 둘이 있는 집이다.
희야 엄마는 얼굴이 예쁘고 외모에 관심이 많았다.
희야 아버지는 대신동에서 노점상을 하고 있었다.
무엇을 팔았는지는 몰라도 희야 엄마도 함께 다녔으나 둘이 늘 같이 있으니
서로가 못마땅한 것이 눈에 보이지만 장사할 때는 그냥 넘기며 참고 있다가
집에 오면 싸우는 소리가 남의 집 까지 들릴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 집은 성한물건이 없다고 했다.
희야 아버지는 여자 손님에게는 지나치게 친절했고
특히 예쁜 여자가 오면 희야 엄마 몰래 돈을 안 받고 그냥도 준다했다.
그러다 들키는 날에는 대낮부터 집에 들어와서 싸우기도 한다.
어느 때는 희야 엄마가 싸움을 하고 며칠인가 가출을 했다.
죽으러간다며 입은 채로 뛰어나갔기 때문에 희야 아버지는 물론
동네 사람들까지도 모두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희야 아버지는 장사도 나가지 않고 술만 마시며 지내던 어느 날
희야 엄마가 집으로 살짝 들어왔다가
집에 있던 희야 아버지에게 붙잡혀서 주저앉고 말았다.
다음날 희야 엄마는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돌아다니다가 죽으려고 방천다리 위에 섰는데
물속에 새파란 저고리가 자꾸 보입디다.
사놓고 한 번도 못 입어 본 게 아까워서
새파란 저고리 입고 죽으려고 저고리 가지러 왔다가 그만 붙잡히고 말았어요.”
오래 지난 후에 서울에서 우리어머니가 막내 집에 온 적이 있었다.
그 때 혜란 엄마가 막내 집으로 어머니를 보러 오면서 희야 엄마랑 같이 와 주었다.
희야 엄마는 아주 세련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느 구청에서 일하는데 직장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
여전히 예쁘고 잘 웃는 모습에서 화목한 가정이 담겨져 있는 듯했다.
부부싸움이란
행복한 마을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삶의 소스라는 걸
희야 엄마를 보면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4. 경자언니
우리 옆집 영자네는 위로 언니가 셋이 있다,
하나같이 얼굴이 예뻤으나 성격은 모두 달랐다.
그 중에 둘 째 언니인 경자언니는 소탈하며 음성이 커서 성격이
남자 같다고들 했다.
경자언니는 미군부대 다니는 남자와 결혼했는데 남편은 얼굴이 갸름하고
말씨도 상냥하며 친절했다.
슬하에는 아들만 둘이 있었는데 남편이 대구의 미8군에서
경기도 어디 미군부대로 직장을 옮기게 되자
당장 남편 따라 이사할 수가 없었던 경자언니는 그 애들을 데리고
친정에 들어와서 살며 직장엘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서 알았는지 경기도 어느 예식장에서 남편이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다급해진 경자언니는 이것저것 가릴 새도 없이 입고 있던 옷 그대로
남편이 있는 경기도엘 달려갔다.
예식장으로 바로 찾아간 경자언니는 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단다.
신랑이 입장하고 난 뒤 신부가 입장 할 때였다.
이 때 신부보다 먼저 경자언니가 들어가서 남편을 잡고
“야 이놈아, 내 캉은(나 랑은) 식도 안올리고 새끼가 둘인데 총각 좋아하네.
누구 신세 또 조질라꼬(망 하게 하려고) 또 결혼을 해!” 했단다.
그 때까지 혼인신고도 않고 살았던 경자언니의 억울함이
예식장 안 하객들 앞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커다란 체구에 부글부글 지진 파마머리를 한 여자가
남편의 카키색군복을 염색도 안한 채로 입고
새신랑 멱살 잡아 내 동댕이치는 걸 본 사람들은 모두 얼마나 놀랐을까.
모두 어디에서 어떻게들 지내실까?
그 때의 그 이웃들도 가끔은 우리들 이야기를 해가며 그리워들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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