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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장수와 냄비사건
김 순덕
엿장수 하면 웬일인지 모르게 구수하고 정겨운 생각부터 든다.
요즘 아이들은 엿을 그냥 주어도 안 먹을 만큼 간식거리가 흔하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는 쉽게 사먹을 수 있는 것이 겨우 고물과 바꿔 먹을 수 있는 엿이 고작이었다. 마을에 나타난 엿장수의 가위소리가 골목길을 쩌렁쩌렁 울리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이 고삿 저 고삿에서 몰려들었다. 떨어진 고무신. 일그러진 양은그릇. 빈병 등등 여러 가지가 쏟아져 나오기도 하고 또 어머니들이 머리 빚을 때마다 빠지는 머리카락도 모아두면 엿 몇 가락씩 바꿔 먹을 수도 있었고 성냥이나 비누 등등 생필품 몇 가지를 맞바꾸어서 쓰기도 했다.
그 무렵 엿장수의 지게에 담긴 물건들은 지금의 이동슈퍼 역할 쯤 되었던 것 같다. 아무튼 모든 물자가 귀한 때라서 재활용으로 쓸 수 있는 고물은 거의 다 엿장수가 받아가기 때문에 엿을 먹는 기회가 아이들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고물과 엿을 바꿔먹는 재미는 겪어보지 않은 요즘아이들은 그 재미를 모른다. 길을 가다가도 녹쓴 못이라도 있으면 얼른 주워서 호주머니에 넣었다가 집으로 가지고 온다. 모아 두었다가 다음에 엿장수가 오면 엿 바꿔 먹을 물건을 마련하느라고 고철이나 헌고무신 등 고물이 눈에 띄기만 하면 모두 모아 둔다.
어느 날 할머니가 밭에 갔다 오시다가 나무 옹치에 걸려서 코고무신 한 쪽이 찢어진 채 돌아오셨다. 앗싸! 할머니의 신발이 엿가락처럼 보이는 순간이였다. 속으로 얼마나 기쁘던지 다음에 엿 바꿔 먹을 물건이 하나 생겼다고 생각하니 신이 났다. 그런데 할머니는 찢어진 신발을 실로 꿰매고 계셨다. “할머니! 신발 버리세요!” 라고 했더니 “이렇게 꿰매면 몇 달은 더 신을 터인데 왜 버리느냐” 라고 말씀하셨다. 띌 듯이 좋아하다가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그날부터 할머니의 꿰매어진 신발이 실밥이 터지는 날만 기다리면서 벗어놓은 할머니의 신발에 눈길이 자주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꿰매 신은 할머니 신발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어쩔 수 없이 할머니 신발을 어머니가 새로 사다드렸다. 그런데 할머니가 은근 슬쩍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네가 그랬지?, 할머니 신발 엿 바꿔 먹으려고 숨겨 놓았지?” 라고 의심을 하고 계셨다. 억울했다. 아무리 엿이 먹고 싶어도 할머니 신발은 숨기지 않았다고 대답하면서 분한 생각이 들어 엉엉 울어 버렸다.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잃어버린 할머니의 고무신에 대해서는 모두가 잊고 있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길 풀숲에서 할머니 신발이 보였다. 할머니가 꿰매 신은 신발을 누가 쭉 찢어 놓은 채로 풀숲에 숨어있었다. 어찌되었던 할머니 한태 누명은 벗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헌 신발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서 할머니께 보여 드렸더니 할머니가 갑자기 신발을 들고 누렁이를 후려 갈겼다.
“이놈의 개새끼 신발을 물어다 버린 놈이 네놈 이었구나!” 하며 큰소리로 꾸짖었다.
옛날 강아지들은 왜 신발을 잘 물어갔는지 모르겠다. 신발이 없어지면 강아지를 원망하면서 온 동네를 누비며 찾기도 하고 할머니 신발처럼 오래 있다가 발견되기도 했다. 할머니는 “어차피 새 신발을 샀으니 이 신발을 엿장수가 오면 엿 바꿔 먹어라” 하며 인심 쓰시듯 내밀었다. 나는 신바람이 났다. 다음에 엿장수가 오면 엿 바꿔 먹을 물건이 없었는데 다행이었다.
며칠 후 기다리던 엿장수가 왔다. 떨어진 할머니의 신발을 엿장수한태 건네주었더니 물량이 적어서 엿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친구들은 엿가락을 들고 신나게 먹고 있는데, 부러움을 견디다 못해 부엌으로 달려가서 냄비를 들고 나왔다. 그런데 쓸 수 있는 냄비는 받지 않고 꼭 찌그러진 냄비만 받는 줄 알고 돌로 펑펑 쪼아서 우그러뜨렸다. 엿장수 아저씨는 웃는 얼굴로 엿을 후하게 주었다. 옛말이 의하면 엿장수 마음대로 라더니 그날따라 여느 때 보다 엿을 많이 주었던 것이다.
‘아 냄비를 찌그려서 오면 엿을 많이 주는구나. 다음에도 또 그래야지’ 그날 저녁 어머니는 부엌에서 냄비를 열심히 찾고 계셨다.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냄비가 다리가 달려서 어디로 간 것도 아니고...”
나는 겁이 나서 방안에 들어가서 죽은 듯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끼던 냄비하나는 엿으로 둔갑해 내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어머니도 잊어버린 채 몇 달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엿장수가 또 왔는데 그날은 엿을 바꿔먹을 고물이 없었다. ‘아 전에도 어머니가 나를 의심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모르겠지’ 라고 생각하며 부엌으로 가서 반질반질하게 닦아 놓은 냄비를 들고 뒤뜰로 돌아가서 돌로 우그렸다.
‘분명히 일그러진 냄비만 갖고 가면 엿을 많이 주었으니 이번에도 많이 주겠지’ 군침부터 삼키며 돌로 신나게 내려치고 있는데 마실 가셨다가 돌아오시던 어머니가 퍽퍽 거리는 소리를 듣고 뒤뜰로 돌아오셨다.
“아니, 이놈의 계집애가 미쳤냐! 멀쩡한 냄비를 왜 우그려 뜨리냐! 너 오늘 혼 좀 나봐라“ 회초리를 찾으러 가시는 틈을 타 도망을 갔다. 어머니한태 잡히기만 하면 전번의 냄비가 없어진 것도 나의 소행으로 들통이 날것이 뻔하니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고 볼 일이였다. 내가 도망가고 있는 쪽은 허허벌판이라서 은신처가 없었다.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아서 얼른 콩 섶 쌓아둔 콩가리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그때서야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때 늦은 후회였다.
캄캄한 콩가리 속에 몸을 숨기고 있으니 어머니가 쉽게 찾을 수가 없어 안전 했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마냥 있을 수도 없지 않는가, 그런데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콩을 꺾어다가 콩가리를 또 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잠잠해지면 나가야지’ 라고 생각하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한참을 바스락 대던 소리가 멈추었다.
날이 어두워오면 우선 집으로 들어가서 심한꾸중이나 매를 맞던지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들어온 구멍으로 나오려고 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좀 전에 아버지가 부스럭대던 소리는 내가 들어온 구멍 앞에다 콩가리를 또 쌓아 놓고 빠져나갈 수 없도록 입구를 단단히 막아놓고 집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큰일이었다. 콩가리와 집은 떨어진 곳인데, ‘이제는 죽는 구나’ 콩가리 속에서 공포감에 사로잡혀 소리 내어 울며 어머니를 부르다가 또 살려 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누구도 들을 수 없는 곳이라 소용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부모님은 어두워도 돌아오지 않은 딸을 찾아 온 동네를 뒤지다가 내가 도망치던 쪽으로 행여나 하는 생각으로 콩가리 쪽으로 오셨던 것이다. 나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더 크게 울면서 아버지를 불렀다. 콩가리 속에 딸이 들어갔을 거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한 아버지 어머니는 허겁지겁 소리 나는 쪽으로 오시더니 “아니! 이놈의 계집애 콩가리 속에는 어떻게 들어간 거야!” 하시며 아버지가 한참을 애쓰며 쌓아 올린 콩가리를 파 혜치고 나를 구출해냈다. 겁에 질려서 벌벌 떨고 있는 나를 업고 집으로 오셔서 따뜻한 아랫목에 눕히고 야단을 치지도 못하고 따뜻한 물을 먹이며 딸이 놀랬을까봐 어머니 아버지는 정신이 없었다. 그 덕분에 두 개의 냄비 사건은 회초리 맛은 보지 않고 수월하게 넘어갔다. 아홉 살 때 엿장수 때문에 콩가리 속에서 공포에 떨었던 생각을 하면 등골이 오싹 하지만 나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다.
요즘 엿장수는 고물을 받고 엿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삐에로 복장을 하고 광대 춤을 추며 돈을 받고 엿을 팔고 있다. 폐품은 고물 장수가 차를 몰고 다니며 엿 대신 현금이나 세제를 준다고 한다. 가끔 엿장수를 만나면 옛날 생각이 나서 엿을 사서 먹어보지만 옛날 맛이 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붐비는 단오장에서 요란스러운 엿장수를 만나게 되면 세태변화의 무상함과 어린 시절의 엿장수가 떠올라 자꾸만 시선이 엿판 쪽으로 쏠리곤 한다. 유년의 추억은 어머니의 부드러운 음성처럼 지금도내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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