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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를 넘다.
1. 잠 못 드는 밤에
오늘은 그이가 종일 우울한 것 같다.
어제 E-마트에 다녀온 피로가 상당하고
겹친 설사로 인한 탈수증으로 시달리고 있지만, 그 보다 더 힘든 것은
내일 있을 검사 결과에 대한 부담으로 스트레스를 갖는 것 같다.
음식도 거의 먹지 않고 침대에서 내려오지도 않는다.
수술 후 처음 받아보는 검사 결과다.
혹시 더 전이가 되어 있지나 않은가?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나도 이렇게 애가 타는데
그이의 속은 또 얼마나 타 들어가고 있을까?
너무도 무섭고 불안한 밤이다
오랜 세월 동안 힘든 일하면서 지친 육신을
또다시 병으로 지치게 만들다니……
참으로 가혹한 형벌을 죄 없는 그이에게 내리는 것만 같다.
매일 매일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살빛을 보면서 울고
계속해서 내려 가기만하는 체중 때문에 한숨 짖고
죽음과 맞서야하는 무거운 마음 등등을
아침부터 밤까지 아니 잠자리 속에서 꿈에서 까지
가슴으로 울부짖는 그이를 보며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 죽여 통곡 한다.
아!
우리에겐 너무도 소중한 이 하루가
맷돌 보다 더 무거운 고통만 어깨에 메어 놓은 채
또 우리들 뒤로 숨어 버리는구나. /2007 년 5 월 21 일 밤
2. 길
그날.
내가 버스에서 내려 다시 차를 갈아타기 위해 가방을 뒤졌을 땐
이미 지갑을 도난당한 뒤였다.
아무 생각도 아무 의욕도 없는 표정으로 축 쳐진 어깨에 걸머진 가방을
쓰리꾼이 칼로 찢고 뒤져간 것도 모른 체 빈 가방만 메고 차에서 내렸던 것이다.
잃어버린 것이래야 몇 푼 되지 않는 현금과 지갑 속의 버스표일 뿐 별것도 없지만
가뜩이나 서러움으로 가득한 나는 죽을 것만 같은 절망으로
길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위암 4기”
수술을 끝낸 주치의가 남편의 병을 이야기할 때는
목안에서 구르던 침이 일순간 다 타버린 듯 하는 갈증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암이라니….
세월은 참으로 냉정하기만하다.
이제는 내게 온정을 베풀어 모른 척 넘어가주기라도 하련만
악순환은 아직도 나를 비켜가지 않는 것이 못내 야속하기만하다.
질긴 세월이 자꾸만 나를 거친 광야바닥으로 밀어 넣는 것만 같았다.
오래전 남편이 하던 사업을 견디지 못해 문을 내렸을 때
그 때도 나는 말할 수 없는 절망감으로 헤매고 다녔었다.
난전에서 채소장사 하는 할머니가 우상처럼 보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스승처럼 보이던 그 때도
용기며 능력 아무것도 없는 내가 얼마나 미웠었던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할 때마다 지나가는 세월을 또 얼마나 원망하였나.
그 세월을 힘들게 밀어내고 이제 겨우 지난시간을 잊을 만한 때에 닥친
남편의 암 선고는 우리를 더욱 더 참담하게 만들었다.
항암치료가 진행 될수록 구토와 설사가 계속되고 냄새에 민감해져서
먹을 수 있는 것도 거의 없었다.
겨우 먹고 싶다며 사달라는 빈대떡을 사러가기 위해 예전에 다니던 집을 찾아
나서던 중에 가방을 찢기고 차비조차도 다 잃어버린 것이다.
그건 정말 아주 작은 일에 불과했지만
지금껏 지탱하며 견뎌오던 안간힘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만큼
내가 나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마음 같아선 길바닥에 엎드려 통곡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힘이 들었으나
그럴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긴 한숨 접고 다시 난 내 길을 찾기 위해 일어서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어려울 때마다 주문처럼 외우던 말을 되풀이하며 중얼거려본다.
“그래, 좌절하지 말자. 약해지지 말자.
강에는 다리가 있고 논에는 논두렁이 있다.
산이 막혀도 당황하지 말자 산모퉁이로 통하는 산길이 있으니까.
돌아서라도 길만 찾아가면 되는 거야.
길은 분명히 있어. 그저 좀 늦을 뿐이야.
여기서 약해지면 안 돼.”
끝없이 끝없이 주문처럼 외우며
경사진 길 위를 걸어가는 나의 주먹엔 어느새 힘이 주어지고 있었다.
땅으로 내려앉을 것만 같던 내 무거운 어께는 가벼워졌고
들어 올리지도 못할 만큼의 무거운 다리는 많이 빨라졌다.
인생이 그렇게 좋은 일만 있을까.
언제나 좋은 일 뒤엔 불행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다니다가
어느새 내 앞으로 막아서곤 하지 않았나.
가끔씩 길 아닌 길 위에 섰을 때도
나의 의지는 언제나 이정표를 찾아내지 않았던가.
"그래, 바람의 방향만 찾자.
거센 바람도 길 따라 달리고
길 끝에는 반드시 바람을 피할 모퉁이가 있는 거야.
길은 연이어 있고 모퉁이 길도 세상과 통하는
널따란 길을 다시 만날 수가 있는 거야."
나의 주문은, 넓고 평탄한길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오늘도 여전히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
하찮게만 여겨오던 소소한 일상은 감사의 제목으로 여기고
지난했던 그 세월까지도 사랑 할 줄 아는 성숙함을 배우며
세월이 그어놓은 길을 남편과 나는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출처: 수필문학 2012년 3월호>
3. 특별한 산행
" 인제 제대로 인간이 되었나봐 "
어제 무리한 산행을 하고 밤에는 다리에 쥐가 나서 아프다더니
아침에 다시 바닷가로 낚시하러 나가며 던지는 남편의 농담이다.
" 구룡폭포까지 2.5km, 만물상까지 3.6km, 만물상 까지는 갔다 올수 있을게야."
소금강 마지막 주차장에서 안내표지판을 보며 만물상까지 가겠다고 할 땐
내심 걱정도 되었다.
몸무게가 37kg까지 내려가 도저히 마지막까지 항암치료를 받을 수가 없어서
중도에 포기한지 이제 겨우 15개월.
지난 4월 말에는 폭포까지도 못가고 금강사에서 내려오고 말았었다.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남편과 나는 한계를 시험하기 위해서 천천히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다지 경사가 급하지도 않은 산이라 힘들지는 않지만
무리하지 않으려고 천천히 오르며 가을 산을 밟았다.
계곡에 내려앉은 가을 잎새가 계곡물을 따라 가다가 바위사이에 막혀
무리 지어 물 위에 떠 있기도 하고
먹이 구하러 나온 다람쥐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도망 다니기가 바쁘다.
자연이나 사람이나 자기의 의지대로만 살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폭포를 지나 무리 없이 만물상까지 왔다.
그래도 남편은 조금 더 걷자고 했다.
조금은 자신도 생기고해서 0.6km를 더 걸어 백운대까지 올라가 보았다.
거기서 우리는 싸온 점심을 먹고 곧장 내려 왔다.
와~, 왕복 8.2km를 네 시간 만에…
우리는 둘 다 말이 없었다.
그러나 내 가슴속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숱한 언어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이제는 괜찮은 거야, 이제는 걱정 없어 등등….
수많았던 걱정의 갈래와 힘든 병상의 무거웠던 짐을
계곡 속에 던지고 내려오는 나의 눈에 보이는 가을하늘은
더 없이 맑고 티가 없었으며
잎 떨어진 감나무에 수 없이 달려있는 붉은 감은
남편의 건강에 채점 100점을 메겨주는 빨간 색연필처럼
아주아주 선명하고 붉은 동그라미들이었다. /20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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