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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모리(Memory)
무심코 버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학생들이 벽보판에 포스터를 붙이고 있다.
뮤지컬 광고 포스터다.
“아…, 켓츠…, 그리고 메모리…”
수년전 큰딸이 우리 부부를 위해서 뮤지컬 <켓츠>의 공연 티켓을 준비 해줬다.
그 때 남편은 항암치료를 끝낸 직후였으니 몸은 말 할 수 없이 쇄약 해있었고
장시간 앉아있기도 힘든 때였다.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워낙 뮤지컬을 좋아하던 터라
우리부부는 딸이 준비한 것을 고맙게 받아들고 공연을 보게 되었다.
뮤지컬 <캣츠>의 대략 내용은 이러하다.
이 이야기의 바탕은 고양이는 아홉 번 다시 태어난다는 서양의 오랜 전설을 기본으로 꾸며졌다.
매년 같은 날 밤, 고양이들이 쓰레기 더미가 가득한 공터로 모여든다.
모두 제각기 사연들을 갖고 있는 각양각색의 고양이들이다.
이들은 신비스런 고양이 듀터라노미'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그가 오면 모여든 고양이 중 한 마리를 가려내
다시 새로운 고양이로 환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된다.
환생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마리 뿐.
저마다 그 선택이 자기가 될 것을 기대하며 호기심을 갖고 모여든 것이다.
이 때 창녀 고양이 ‘그리자벨라'가 노래를 부르며 등장한다.
그녀의 노래는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며 방탕하게 지내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황금시절, 왕년에 인기가 있던 때를 그리워하며 새날을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이 노래를 들은 다른 모든 고양이들은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세상에 태어날 수 있는
천혜의 기회를 양보한다는 내용이 담긴 극이다.
처음 시작 할 때부터 고양이들은 객석으로 돌아다니며
관객과 손도 잡고 포옹도하며 흥미를 돋우었다.
재빨리 무대 위로 오르는 고양이, 무대 위에서 정신없이 떠드는 각색의 고양이들을 보느라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극에 열중 하고 있었다.
더구나 극의 주인공인 ‘그리자벨라’가 등장하여 주제곡인 ‘메모리’를 부를 때는
마치 내가 그리자벨라라도 된 듯이 빠져들고 있었다.
추억이여/ 아름다운 날들이여/ 나는 달빛 아래 홀로이
지난날을 생각 하며 미소 지어요/ 그 때는 참 아름다웠죠.
추억이여 다시 돌아와 줘요.
하루가 다 타버린 뒤/ 가로등은 꺼지고 또 다른 밤이 지나면
또 다른 날이 밝아 오죠.
여명이여, 나는 태양이 뜨기를 기다려야 해요./ 새로운 삶을 생각해야 해요.
난 포기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새로운 날이 시작 될 거예요.
이 곡은 극 중 ‘그리자벨라’가 자신의 젊었던 날을 회상하며 부른 곡으로
희망을 잃지 않고 새로운 날을 맞이하겠다고 다짐하며 부르는 노래다.
나는 점점 더 빠져 들고 있었다.
그 노래는 흡사 나의노래처럼 들리기도 했다.
서글펐다.
앞만 보고 여기까지 달려왔으나 병들고 초라해진 지금의 우리 모습이
저 '그리자벨라'와 같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니 서글펐으며,
젊고 아름다운 때를 의미 없이 보낸 내가 너무 서럽고 초라해 눈물이 났다.
마침내 나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도 들릴 만큼 흐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몸이 성치 않은 남편은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 무리가 갔었다.
여름이기도 했고 거기에 딸의 배려로 일등석에 앉았으니 에어컨 찬바람 때문에
추위에 떨고 기운도 떨어졌던 것이다.
옆에서 울고 앉아있는 나에게 무어라 말은 못하겠고
극이 끝나도록 기다리자니 쓰러질 것 같이 힘든 지경이었던지
자기가 먼저 나가겠다고 할 때서야 난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울음을 그쳤다.
남편을 부축해 집으로 오면서도 내 입에서는 “메모리…”를 흥얼거렸고
머릿속엔 조금 전 그 장면을 연상하고 왔을 정도로 푹 빠져 있었다.
포스터 한 장으로 인한 기억은 참 새삼스럽다.
세월이 한참 지나 남편도 이제 건강한 삶을 다시 갖게 되었다.
지금은 그 때의 그 장면이 서글픔보다 희망으로 다가 올만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모두 다 내리고 나 혼자만 태운 버스는 종점을 향해 계속 달린다.
인생도 이렇게 늘 달리고 있다.
가고, 또 가고, 종점까지 달리는 게 인생이다.
차창 밖의 풍경이 바뀌듯이 늘 바뀌기만 하는 세상 속을 사람들은 달려가고 있다.
뒤돌아 생각해보니 메모리의 노랫말은 삶의 철학인 것 같다.
달리며 만나는 낯선 삶의길 위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삶을 매진하면
반드시 좋은 날은 오지 않을까……
‘그리자벨라’가 행운을 거머쥐듯이…… / 2012. 2.
어머니와 노래
“언니, 난 저 노래만 들으면 큰어머니 생각나”
지난여름 함께 설악산 갔다 오는 중에 사촌동생 영욱이가
라디오를 들으면서 내게 하는 말이다.
차 안에는 기독교방송에서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이라는 찬송가가
성가대의 합창으로 흐르고 있었다.
'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어려운 일 당할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이 곡을 어떤 연유로 좋아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의 어머니는 가끔 가사만 적힌 큰 글 찬송가를 펴서
혼자 부르시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이 외에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라는 찬송가도 자주 부르셨다.
혼자서만 그냥 간구하듯 작은 목소리로 부르시기 때문에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무슨 곡을 부르는지 알 수가 없을 만큼
그냥 흥얼흥얼 부르는 찬송가이지만 그래도 곡조는 비교적 명확한 편이다.
지금 살아계시면 구십이 넘는 연세이니 음악적인 어떤 교육을 받은 적도 없으며
시골 분이셔서 감히 소리 내어 곡조 한번 따라 해본 적조차도 없을 텐데
찬송가 곡조를 대부분 틀리지 않고 잘 부르셨다.
음색 역시 맑고 카랑카랑해서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미루어 생각하건데 아마도 우리 동기간들의 목소리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본다.
나는 어릴 때부터 노래 잘 부른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어린이 성가대에서 소프라노솔로는 독차지 했을 정도였다.
나뿐만 아니고 언니역시 노래를 잘 불러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모두 언니에게 노래하라며 박수치고 청하기도 했다.
언니의 목소리는 아주 곱고 예뻤으며
가수 백설희가 불렀던 노래를 특히 더 잘 불렀다.
‘봄날은 간다.’ ‘아메리카 차이나타운’같은 노래를 부르면
간드러지기도 하고 구르는 듯 하는 노래솜씨에 모두 감탄할 정도였고
모두들 언니의 그 탁월한 목소리를 부러워하곤 했다.
언니는 가끔
“그 때만해도 여자가 노래 소리 크게 내면 동네서 흉봤는데
이상하게 어머니는 다른 건 조금만 잘못해도 지청구를 했는데
내가 노래하는 건 가만히 놔두셨어.”라며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어머니의 마음속에도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면사무소에 근무하셨던 것 같다.
집안일은 어머니에게 맡기고 늘 밖으로만 다니셨던 모양이다.
내가 태어나는 날에도 눈이 허리까지 왔는데
치우지도 않는다며 외할머니가 아버지를 탓 하시고
손수 굴을 만들어가면서 샘에 물 길으러 다니셨다고 들었다.
논농사를 지을 때도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가시면
어머니 혼자 일꾼 데리고 일하시느라 무척 고생 하셨다고 했다.
그 후 6·25사변을 겪으면서 붙잡혀 가신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 혼자 고생했던 일이며,
낯선 대구로 내려와서 살아야했던 여러 가지가 힘에 부칠 때도,
어쩌면 어머니는 언니의 고운 노래를 통해서
한 순간 시름을 잊으신 게 아닐까 하며 짐작도 해본다.
아마도 그 후 교회에 다니면서 찬송가를 부르게 되자
의지하고 싶을 때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을 부르시며
마음속의 짐을 조금이나마 내려 놓으셨을 것이다.
올곧기만 한 어머니는 삶이 다하도록 그렇게 종교의 길을 선택하며 사셨다.
영욱과 이야기하는 사이
차는 한계령의 짙은 안개비 속을 빠져나오고
여름 오후 산머리를 감고 있던 구름은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
구름처럼 세월의 흐름 따라 모양을 바꾸어가며 살아오셨을 내 어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으나
사촌인 영욱이까지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곡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만큼 당신의 품이 넓었다는 뜻으로도 받아들여진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아이들의 마음속에 남게 될까?
이리저리 부대끼며 살아온 삶을 가슴 아리게 여겨주기나 할까?
가끔 마음이 허전할 때 푸념처럼 부르는 나의 노래
‘내 마음 별과같이’를 기억이나 해 주려나?
“산 노을에 두 두우우웅실 흘러가는 저 구름아,
너는 알리라 내 마음을 부평초 같은 마음을
……………………
내 마음 별과같이 저 하늘별이 되어
영원히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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