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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으로]
1. 내 마음 속의 창
세월은 늘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를 키우며 생각도 성숙해지도록 만들어 주고 있지만
미련스럽게도 나는 한참의 세월이지난 후에야
오래도록 철없었던 나를 보게 되었고 뒤늦은 후회만 거듭하고 있다.
오늘도 오래전 일을 뒤돌아보고 철없던 내가 부끄러워
또 한 번 고개를 숙이며 스스로를 책망해 본다.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는 무척 넓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파트를
열 개 동도 더 넘게 지을 수 있는 땅이었을 만큼 넓은 곳이었다.
우리가 살던 사택 뒤로도 매우 넓은 빈터가 있었다.
그곳에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 조금씩 채소를 갈아서 먹었다.
우리 어머니 역시 빈틈없이 채소를 갈아 아침저녁 공을 들이셨다.
잘 다듬어 저녁 장이 서기 전에 근처 시장 반찬가게에 보내려고
뜨거운 햇볕도 마다않고 열심히 밭일을 하셨다.
더러는 고추밭둑에 앉아서 머리 수건을 내려 땀을 닦기도 하고
지친 듯 멍하니 앉아 쉬기도 하셨다.
이때 찬물 한 사발 내드리기라도 했으면 얼마나 좋아 하셨을까?
내 책상은 창가에 붙어 있었다.
의자에 앉으면 밭에서 일하시는 어머니가 바로 보이는 곳이다.
어머니가 밭에서 김 메는 것도 보이고
두레박으로 물을 퍼 나르며 물을 주는 것도,
밭둑에서 채소를 다듬으며 찬거리 준비 하는 것도 다 보였다.
알뜰한 어머니의 생활 지혜였으나 그걸 모르던 철없는 나는
햇볕에 앉아 흙 만지며 일 도우는 게 싫기도 했고
나와는 상관없이 의례히 하시는 어머니의 일과라 여기며
창밖의 어머니를 매일 무심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나보다 세 살이나 적은 막내는 달랐다.
학교에 갔다 와서 어머니가 보이지 않으면 밭으로 달려 나간다.
어머니랑 같이 물주고 김매고 채소도 다듬는다.
힘든 어머니를 위해 동생은 늘 그렇게 힘이 되어드리곤 했다.
“니도 쫌 나와서 거들어라.”
“나는 안 할란다. 손에 흙 묻히는 거 싫다.”
막내가 언니고 내가 동생인 순간이다.
나는 늘 그랬다.
시골길을 지나며 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볼 때,
어제 같이 내가 봄나물을 캐며 밭으로 다닐 때,
언제 어느 때든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생각나는 창이 있다.
대구시 대봉동 그 집의 한쪽 밭에서 물을 주며
웃음을 주고받는 모녀의 모습이 보이는 창.
나 혼자 살짝 열어보는 내 마음 속의 창이다.
그 창속 이만치 물러나 우두커니 바라보며 서있던 나는
그 때의 철없음을 후회하며
어머니가 보이는 창을 눈물로 흐려놓는다. / 2008. 4.
2. 옛 길
늙은 플라타너스나무 뒤쪽에 붙어서 마주 보이는 길을 아까서부터 쳐다보던 나는
결심한 듯 도로를 건넌다.
이곳으로 바로 가면 이 시간쯤 영수학원에서 나오는 애들과 만날 것 같아
몇 발자국 걷지 않고 다시 좌측 길로 건너본다.
일단 파출소 옆의 벽오동나무 밑까지 가서 양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한 번
추슬러가며 단단하게 매만지고 고개를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다.
‘만화방을 지났다.
술집을 지났다.
점방을 지났다.
이발관을 지났다.
휴~. 이제부터는 괜찮다.’
곁눈질로 옆을 보며 이발소를 지난 뒤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돌려
누가 보는 사람이라도 없나싶어 조심스럽게 좌우를 보다가
안심하고 그 때부터 앞을 보며 가는 길을 재촉해 본다.
지금 이 모양새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봉산시장 반찬가게에 우리 집 호박과
우엉잎을 가져다주고 다른 것으로 바꾸러 가는 길이다.
이를테면 어느 날은 생선으로 어느 날은 두부나 어묵으로 물물 교환하는 일이다.
한 쪽 손에는 검은색 가는 전깃줄로 엮은 장바구니 속에 호박잎으로 싼
새파란 애호박이 꽉 들어차있고 한 쪽에는 우엉잎 묶은 다발을 싼 보자기가
큼지막하게 들려져있다.
어머니는 비어있는 땅이 보이면 어김없이 채소를 심어서
시장의 채소가게에 팔아 반찬값을 보태며 사셨다.
채소뿐만 아니고 집 옆으로 남은 공터에 닭장을 지어서 이삼십 마리는 족히 될
닭도 키워 달걀도 가게에 내다 팔곤 하셨다.
워낙 알뜰하고 부지런하셔서 당신의 몸수고 정도는 아랑곳도 않고
집안의 푼돈을 스스로 마련해가며 살림을 꾸려나가셨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심부름을 동생과 내가 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야 하는 이야기지만 어머니 역시
그 길로 채소를 들고 다니시기가 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 때는 상업이 다른 업종보다 격하되어 무시되었던 시대라
명색이 큰 회사 서무과장 사모님이 보따리 들고 시장 다니다가 누굴 만나면
남부끄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침나절은 어머니가 다녀도 오후시간 회사사람들 왕래가 많을 땐
우리에게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우린들 어찌 좋았을까.
중, 고등학교시절은 이러한 심부름이 얼마나 싫었던지
학교를 파해도 일부러 늦게 가는 날이 허다하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다음날 아침 학교 갈 때 오늘은 일찍 오라고
꼭 다짐을 주곤 해서 피치 못해 하는 심부름이다.
평소 이 길을 다닐 때, 그래도 내 딴에는 일류학교에 다닌다고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하게 세워 걷고 다니면
약국이며 세탁소 아저씨가 온갖 칭찬으로 나를 추켜세워 주는데
이런 보따리 심부름으로 모양새가 구겨지는 게 자못 자존심이 상했던 까닭이다.
시장에 심부름을 다닐 때도 꼭 교복을 입고 다녀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기억도 없으나 불편한 옷으로 그 무거운 짐을 양손에 쥐고 다니던 길에 대한 기억이
가끔씩 부끄러움과 웃음으로 내게 닥아 오기도 한다.
주로 심부름 다니던 때는 여름이라 사람들이 부채를 들고 밖에 나와 있기 때문에
더구나 지나다니기가 싫었던 나는 학원과 약국, 세탁소가 있는
오른 쪽 도로를 피해서 왼 쪽으로 다니곤 했다.
그나마 한여름에는 양 옆에 가로수로 심어진 수양버드나무가 길게 늘어져
부끄러워 고개 숙이던 나의 자존심을 가려주기도 했다.
꼭 같은 심부름으로 처지가 같았던 동생도 이렇게 토로한다.
“엄마는 이 구석 저 구석 빈자리마다 호박을 심어 놓고
매일 호박 따러 가자며 바케츠 들고 나를 끌고 다니는데,
그 것 까지는 괜찮지만 시장에 가서 다른 것과 바꾸어 오라고 할 때는 아휴-.”
“하하하, 나도 진짜 그건 싫었거든”
동생과 나는 지금도 그 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싫었노라 하면서 웃는다.
동생은 누굴 만나는 게 싫었을까?
혹시 만화방 속에 있던 머슴아들?
어디서든 폼 나는 대장이었는데 시쳇말로 쪽팔려서 얼마나 난감했을까?
나도 많은 세월을 달려오면서 숱한 길 위에 서서 때론 당당함으로
때론 망설임으로 피할 수 없는 길을 걸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뒤돌아보니 부모님의 심부름 이외엔 아무런 짐을 지지 않았던 그 때가
얼마나 천진하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는 것을 그 때는 왜 몰랐었던지…….
바람 부는 가을에 서서.
나는 실버들 가로수 낙엽 지던 그 길을 생각하며 눈을 감아본다.
바람이 불적마다 이리저리 무수히도 굴러다니던 버들잎이
머릿속에서 뒹굴고
그 곳에서 웃고 있던 마음씨 좋은 동네사람들의
넉넉한 모습이 환영으로 가까이 닥아 오고 있다.
세탁소집 할머니는 지금도 살아 계실는지….
가을바람에게 소식을 물어본다.
3. 오래된 사진 속으로
지겹게 느껴지는 겨울을 털어내느라 묵은 서적이며 노트를 추려서 방바닥에 던지는데
오래된 사진 한 장이 튀어 나온다.
초등학교 교복을 입고 단발을 한 내가 조그마한 증명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누군가 카메라로 찍어 준 모양인데
뒷장에는 6학년 11반 김영원이라는 글씨가 씌어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중학교원서 때문에 필요해서 학교에 제출하려던 것이었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사진을 들여다보던 나는 배경 속 한 쪽 찍힌 자국이 있는 벽돌담에 시선이 모아지면서
거의 반세기전의 어린 날로 되돌아가고 있다.
1960년 2월 28일.
지금은 이 날을 ‘2‧28민주화운동’이라 부른다.
그 때의 젊은 함성은 지금도 내 귀에 들리는 듯 생생한데
어느새 반세기라는 세월이 지나다니….
그러나 수많은 희생을 겪으면서 써 온 민주화의 역사와, 발전을 거듭하는 사회를 보면
그간의 세월이 결코 짧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어지고 있다.또한 세월이 그렇게 역사만
바꾼 게 아니라 나도 참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어 새삼 나이 듦을 실감해 보기도 한다.
이 날은 일요일이었고 수성천 변에서 신익희 대통령출마자의 연설이 있는 날이었다.
어린 우리들에게도 어른들의 분위기를 눈치 챌 만큼 선거유세는 살벌했다.
우리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오빠 언니들이 ‘유정 천리’라는 곡을 정치를 빗대어
비난하는 노래로 개사를 해서 부르면 어른들은 큰일 난다며 나무라기도 했고
민주당을 선동하면 빨갱이라는 소리까지도 들을 정도였다.
그 날 낮,
갑자기 학생들의 고함소리가 들리고 주위가 소란스러웠으나
그 소리가 너무 엄청났기 때문에 나는 무서워서 밖을 내다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른들의 이야기로는 대구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 담을 넘어나가다가
학교 벽이 무너졌다고 했고 명덕로터리에 고등학생들이 모여 있다며 구경 간다고도 했다.
소심한 나는 우리 집이 대구상고 바로 옆이었지만 그 다음날이 되어서야
상당히 무너져 있는 학교 담 구경을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대구상고학생들을 선거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인데도 등교시켜서 강당에 모이게 하고 구충제를 단체로 먹이자
격분한 학생들이 담을 넘고나가다가 급기야 벽이 무너졌다고 했다.
이 학교뿐만 아니라 대구시의 모든 공립 고등학교에서도
학생들을 강제 등교시켜서 교문을 걸어 잠그고 행동에 제재를 하였으나
학생들의 단체 항거에는 속수무책이었던지 거리에는 학교를 벗어난 학생들의 시위와
경찰들의 저지로 거칠고 음산한 모든 것이 무섭기조차 하였다.
그 날 자유당 정권에 맞서기위한 고등학생들은 관공서, 시청등지로 시위를 다녔고
밤에는 자유당 국회의원 S씨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부정선거와 부패로 국민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던 정부와 그 당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
드디어 고등학생들에게서부터 시작 된 것이다.
그 즈음 대부분의 파출소가 데모 대원들에 의해 출입문이며 유리창이 깨어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며 우리 집 앞의 파출소는 일부가 불에 타서
흉측한 모습으로 한동안을 지내기도 했다.
이 2‧28운동은 4‧19의거의 시초가 되었고
그로 인해 정권이 바뀌기도 한 최초의 불씨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의 실질적인 주인은 그 당시의 자유당 실세였던
이기붕씨 라고 했다. 회사 안에는 이기붕씨의 별장이라며 대리석인 것 같은
희고 깨끗한 돌로 잘 지은 단층집이 있었다.
학생들의 데모가 시작 되던 날 시내에 사는 국회의원 집이 불에 타자
이 별장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낀 회사에서는 그 날로 출입구를 막기 위해
급하게 대문을 만들었다. 원래는 정문이 따로 없이 붉은 벽돌사이에 쇠줄로 걸어
출입을 통제 했는데 튼튼한 나무로 대문을 크게 만들어 안에서 걸어 놓은 것이다.
겨우 정문은 마무리 했지만 정문 바로 옆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택 쪽으로 들어가는 문은 벽만 허물어 놓은 채 미처 달지 못한 어느 날이었다.
(내 사진 속의 배경에서 보이는 찍혀진 자국이 있는 바로 그 벽이다.)
데모 대원들이 이기붕씨 별장을 부수기 위해서 몰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식구들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 때 우리는 사택으로 들어가는 첫 집에 살았고 그 집은 넓은 목조 가옥으로,
밤중에 보면 오해를 받을 것 같아 분별없는 학생들이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피란 아닌 피란을 가기로 하고 이불 몇 개 챙겨
사택 뒤쪽에 있는 밭으로 가서 밤을 새웠다.
그런 중에도 아버지는 사무실로 회사 지키러 들어가시고
어머니는 높은 데로 올라서서 담 밖을 내려다보고 계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부모님은 사십대 중반이셨으니 대충 짐작으로
아무 일 없을 것으로 믿고 계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대모대원들이 회사로 들어가는 문을 부수기 위해서
돌로 때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자 이불을 감고 있으면서도 마구 떨고 있었다.
아마도 그 때가 3월 하순이거나 4월 초가 아닐까 생각 되는데 얼마나 춥고
무서웠는지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떨던 기억은 영영 잊혀 지지 않는다.
아직 어렸고 어리석었던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자유당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버지가 이기붕씨 회사에 다닌다는
사실조차도 죄를 짓는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특히 내 친구 영옥과는 어느 날 방천시장에 같이 걸어가는데
이기붕씨의 부통령 출마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것을 보며
“이기붕은 간신배야 정말 나빠”
하는 소리를 들은 뒤부터 더욱 더 나의 집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영옥의 아버지는 민주당원으로 활동하다가 감옥에 갔다는 소문이 나 있었고
어머니가 교사이며 또 공부를 잘 하고 영리한 아이이기 때문에
그 애의 말에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수긍을 하는 편이었다.
그 밤 아마도 나는 추위에도 떨고 앞으로의 학교생활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떠느라
이불을 덮고 또 덮어도 추운 밤을 지냈던 모양이다.
날이 어슴푸레 밝아 오면서 학생들은 흩어지고 우리는 다시 집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그 무서움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계속 이 사실은 절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아야겠다고
맹세까지 해 가며 몸을 뒤치락거리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회사의 정문은 얼마나 견고하고 높았던지
밤새 돌로 찍힌 자국은 많았으나 한쪽이 조금 부서졌을 뿐 다른 탈이 없었고
아무도 그 문을 넘어가지는 못 했다고 한다.
우리 집도 아무 일 없었으며 나의 집에 대해서 물어보는 친구 역시 한 명도 없었다.
단지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반세기 전 나의 역사이야기로
조그마한 증명사진 속에서 작은 추억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 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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