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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고향에서
김 영 원
눈이 그치고도 보름이 지났는데
눈으로 덮인 논은 아직도 흰 밭이다.
강원도의 겨울은 덧덮인 눈꽃이 녹지도 않은 채
겨울작물처럼 논밭마다 소복하다.
빨래를 걷으러 올라간 장독대 위에서서 하얀 들판을 바라보니
문득, 가물가물한 어린 날의 한순간 속에 내가 서 있는 것만 같다.
내 고향 충청도에, 그 때는 저수지가 없었던지
겨울에는 아득한 논 전체에 물이 들어 와있었다.
한 겨울 얼어붙은 논은 말 그대로 스케이트장이다.
고향동네 사람들은 이 얼음판 위를 걸어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질러 다녔다.
지금보다 훨씬 춥기도 했고 옷도 따습지 않은 때 이야기다.
우리 큰아버지 집에서 외갓집 까지는 몇 마을을 지나야 한다.
추운겨울날 벌판을 질러서 외갓집에 가는 일이란
그리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어느 해
우리 오빠와 외삼촌이 나를 데리고 큰집에서 외갓집으로 가야하는데
아무래도 꼬맹이 걸음이라 걷는 것도 시원찮고
춥기는 한데 버려두고 가진 못하겠고 귀찮기도 했던 모양이다.
사금파리 두개를 내 코고무신 밑에 놓아주곤
둘이서 내 양팔을 한쪽씩 잡고 이 얼음 논을 달리기 시작한다.
군데군데 얼음 위로 올라온 벼 밑동으로 지나다가
내 고무신 밑의 사금파리를 놓치면 셋이 다 나둥그러지는 건 보통이다.
그럴 때마다 혼나는 건 분명히 나였을 것이다.
춥고 손도 시린데 성질 급한 우리 외삼촌,
사금파리 주워주며 날 얼마나 혼 내켰을 게 분명하다.
나 보다 열 살이나 위인 외삼촌과 오빠가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다.
한참을 멀거니 마음을 눈밭에 올려놓고 서 있는 나를 스치며
‘휘익-.’
시린 겨울바람 한줌 논밭으로 내달리는데
까만 교복 반듯이 입고 까만 모자를 썼던 오빠와 외삼촌이
바람 따라 함께 달려가는 듯하고
분홍색 유똥 치마저고리에 단발머리를 했던 그 겨울의 내 모습은
추억으로, 그리움으로 눈밭에서 놀고 있다.
이미 반세기나 지난 어릴 때의 내가….
명절 스케치
김 영 원
어머님은 어린 증손자들에게 일일이 만 원짜리 지폐를 나누어 주시며
“내년 설에도 내가 살아서 이렇게 세뱃돈 주게 될까?”하신다.
꽉 막히는 가슴이 목구멍까지 팽팽하게 올라온다.
올해로 91세.
오랜 반려자이시던 아버님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처음 맞는 명절이다.
스스로의 몸으로는 혈액이 생성되지 않아
주기적으로 수혈을 받아 연명하시는 어머님은
마음속으로 늘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 같다.
“나는 인제 이런 것 다 필요 없다. 한 푼이라도 너희들이나 써라.”며
우리들로부터 받은 돈을 도로 다 내어 놓으신다.
아들도 딸도
“아이고, 수지맞았네.”
“엄마, 내년 설날 세뱃돈은 이것보다 더 많이 줘야 해요.”
하면서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서둘러 방을 나오며 먼 곳으로 시선을 날린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노모에게 주어졌을까…
함께 할 수 있는 명절은 몇 번이나 될까…
신산을 겪으며 사시던 강건한 세월은
어느 강물에 흘려보내셨을까.
야윈 얼굴위로 무상함만 겹쳐있고
우두커니 증손을 쳐다보는 어머님의 눈 속에는
재롱부리며 매달리는 증손들의 귀여운 모습들만
꼭꼭 박히어 빼곡히 들어앉아 있다.
주루룩 눈물 한줄기가
검버섯 위에 번지며 주름진 볼을 적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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