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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그림 - 내 동생]
1. 막걸리
"막내야 ! 가서 술 받아 오너라."
아버지는 늘 술심부름을 막내에게 시키셨다.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했던 동생은
좋아 라며 알루미늄 주전자를 받아 쥐고 달려 나간다.
한참 후 막걸리 반 되를 받아와서 아버지 앞에 내밀며
“아버지 여기.” 하는 동생의 입에서는 막걸리 냄새가 풍기고
"예끼, 이년!" 하는 아버지 입에서는 웃음이 번지곤 했다.
동생에 관한 내 기억의 첫 그림은
하얀 얼굴에 몸은 아주 약했고
해를 볼 때 언제나 한쪽 눈을 찡그리며 쳐다보곤 했다.
주전자를 쥔 동생이 길 건너 저만치에 붙어있는 술집으로
잰걸음 질을 하며 막 달려가던 모습이
간색파스텔화를 보는 것같이 아련하게 보인다.
그 때의 그 울퉁불퉁하던 회색빛거리와 어린 날의 장면들.
술독 안을 휘휘 젓던 술에 젖은 바가지와
술가게의 거뭇한 흙벽에 걸려있던 찌그러진 술 주전자 까지.
오래된 흑백영화의 필름처럼 희미한 그림들이
흩어진 조각이 되어 나의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고 있다.
나는 그 작은 조각들을 조심스레 하나씩 주워 맞추어본다.
고된 세상살이도 가슴앓이도 모른 체 천진스럽기만 하던 그`날들을….
2. 삐라와 내 동생
총선이 다가오니 텔레비전이며 신문은 매일 선거이야기로 떠들썩해진다.
오늘도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낯선 사람이 다가오더니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이며
당과 후보자의 이름이 적힌 명함을 손에 쥐어주며 내 앞을 지나간다.
왜 갑자기 어린 날의 기억이 났을까……
격동의 세월을 눈으로 보며 자란 우리들의 세대는
유년의 추억 역시 겪어온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의 보급이 낮았던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3·15 부정선거를 전후한 2·28 학생의거, 4·19혁명,
5·16등의 급변하던 시국에서는
긴박한 뉴스가 아침저녁으로 상황이 다르기도 했다.
그 때마다 신문사에서는 정식신문이 아닌‘호외’즉
임시뉴스를 인쇄한 전단지를 만들어서(그 때는 삐라라고 했음)
사람들이 많은 곳에 뭉치로 들고 다니며 던져 놓기도 했다.
지프차를 타고 가면서 던지기도 하지만 배달원이 직접
“호외요!” 하고 던지면서 구리 빛 종을 흔들며 달려가기도 하면
아이들은 그 뒤를 따라다니며 삐라를 줍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했던 것은 비행기에서 뿌리던 삐라였다.
헬리콥터 소리만 나면 하늘을 쳐다보고 사정없이 달리느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자전거에 치이기도 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기억 중의 하나이기도하다.
무엇을 선전했는지 어떤 기사가 적혀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린 우리들에겐 아마도 하늘에서 내리는 삐라가
꽃비처럼 아름답고 신기했던 때문이었으리라.
우리 역시 삐라를 주우려고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 안을 온통 돌아다니곤 했었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는 누에고치로 실을 뽑는 제사 공장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아파트 열 개동은 지을 수 있으리만치 넓었고
빈 공간과 사용하지 않는 건물이 많아 사택에 살던 우리들은
이곳이 놀이터처럼 이용되는 자유공간이기도 했다.
헬리콥터 소리가 났다 하면 달려가는 곳도 바로 이곳 회사 안이다.)
이런 일엔 내 동생이 제일 적극적이었다.
언제나 남보다 먼저 삐라를 주워야 직성이 풀리는 동생은
키 큰 은행나무위로 올라가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종이를
손으로 받거나 지붕위로 올라가서 기다리기도 했다.
어느 때는 뜨거운 여름날 회사기숙사 슬레이트 지붕 위로
삐라 받으러 올라갔다가 발바닥을 데어 고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아픔은 아무렇지도 않은 동생이었다.
다음날 또다시 뜨거운 지붕 위에 서 있는 동생을 볼 수 있으니까.
어린 우리에겐 쓸모도 소용도 없는 삐라였건만
그냥 더 많이 주워 모아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것,
그 것만이 전부였었던 천진스런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그 건 너무나도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세월이 아무리 소용돌이치며 지나도
기억 속의 유년은 멈추어 서 있는데
많은 시간의 굴곡을 따라다니느라 지쳐버린 몸은 쇠잔해있고
돌아갈 수 없는 유년의 그 시간들을
나는 이 시간 가슴으로 두레박질 하며 그리워하고 있다.
3. 그 때 신천에서는
누구라도 세월이 지난 후에 되돌아보는 어린 날의 기억들이
어찌 한 순간이라도 소중하고 그립지 않은 날이 있을까.
가끔씩 나도 되돌릴 수 없는 어린 날의 길 위에 서서 발을 떼지 못할 때가있다.
놀 것이래야 기껏 돌멩이로 집짓기나 하던 때였으니 모양새인들 오죽했을까.
그냥 통치마에 단발머리, 코고무신을 신고 있었음직한 날들이련만
무엇이 그리도 애틋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는지….
어릴 때 우리는 대구의 신천 부근에서 살았다.
내 기억속의 신천은 늘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림으로 살아난다.
그 신천은 방천이라 불리는 냇물이었을 뿐인데 채 열 살도 안 된
어린 나의 눈에는 크고 넓은 강처럼 보였다.
그 신천은 물고기가 훤히 보여서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맑았으며
나는 코고무신 한 짝을 다른 한 짝에다 구겨 넣어 돛단배를 만들며 놀기도 하고
사내애들이 잡아주는 물고기를 고무신에 담아서 다니기도 했다.
물이 깊은 빨래터에서는 쉴 새 없이 빨래방망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냇가 자갈 위에는 누런 광목이 기다랗게 널려져 햇빛바래기를 하는데
햇빛이 하얗게 쏟아져 바늘처럼 물위로 꽂히며 반짝일 때는
광목도 냇물도 심지어 자갈까지도 온통 빛나는 하얀색이 되어 눈이 부시곤 했다.
상류 쪽 빨래 삶는 곳에서
진종일 양잿물 냄새를 맡으면서 품일을 하는 아주머니들은
연신 머리 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대며 빨래를 삶았고,
건너 편 염색 터에선 검정색 옷과 기다란 빨간색 천들이 무수히 걸려있었다.
그 염색 천들은 흡사 국수공장에서 국수가락 걸쳐놓고 말리는 것처럼
나란히 걸려있었다. 그 검정 옷들은 카키색 군복을 군인이 아닌 일반인들이
작업복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검정색으로 염색해 입었다는 것과,
붉은 천은 이불감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도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시원한 방천다리 밑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았다.
더위를 피해 이곳에 온 사람들은 쌀가마니를 펼쳐 만든 자리위에서
장기를 두거나 낮잠을 자기도하는 한가로운 곳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탓인지 이곳에는 유난히 떡장수 아주머니들도 많았다.
어른들은 가끔 우스갯소리로 아이들을 놀리셨다
“너는 주워왔어. 네 엄마는 방천다리 밑에서 떡 장사 해.”라고….
아버지도 종종 그러셨다.
“막내야, 너는 주워왔어. 너의 진짜엄마는 다리 밑에서 떡 장사 하고 있어.” 라고.
아버지는 더운 여름날 저녁이면 늘 막내를 무동 태워
방천 둑으로 나가셔서 더위를 식히곤 하셨다.
어느 날 막내와 함께 나갔다 오신 아버지께서
“나 오늘 막내 데리고 나갔다가 다리 밑에 가서 제 엄마 찾아 달라고 하는 바람에
아주 혼났네. 네 엄마 오늘은 떡 팔러오지 않았나보다 하고 데리고 왔지만.”
하시며 어머니와 한참을 웃기도 하셨다.
주워온 아이라며 놀려먹던 내 동생은 어지간히 컸을 때까지도
아플 때는 어머니가 업고 병원에 다니셨는데,
6‧25사변 때 태어나 젖을 제대로 먹이지 못한 막내를 어머니는 늘 안쓰러워하셨다.
세월을 담은 냇물은 내 어린 날을 멀리 흘려보내고
지금 그 곳에는 새 옷 입은 신천이 옛날을 낯가림하며 흐르고 있다.
흙먼지 풀썩이며 뛰어놀던 방천 둑 위로 아스팔트가 깔려서
그 위를 연이어 자동차가 달리며 시커먼 매연을 토해내고
돌돌거리며 맑은 물이 흐르던 시내는 흐려진지 이미 오래되었다.
가을이면 메뚜기 잡으러 다니던 다리 건너 논둑길엔
수 없이 들어선 고층아파트의 딱딱한 세멘 벽들이 즐비하게 막아서있어
세월의 흐름을 실감케 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도 흐르고 있는 또 하나의 내마음속 신천에는
동생을 무동 태우며 두 팔을 치켜든 아버지의 모습이랑
빨래 감을 머리에 이고 앞서 가시다가
빨래방망이 쥐고 따라가는 나를 돌아보며
어서 오라고 재촉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방천 둑 저만치에서 가만히 웃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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